서해의 아름다운 고을 서면

  서 면(西 面) --- 소개
   Seo-Myeon Introduction

북동쪽으로 보령시 주산면,남포면과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론 비인면과 이웃하고 있고, 서쪽 서해안을 따라 35㎞에 이르는 해안선과 옥토의 내륙으로 이루어저 어업인과 농업인이 각각 50%를 차지하고 있어 농업과 어업이 잘 어우러진 청정지역입니다
우리나라 가장 북단 동백꽃 자생지이며 풍부한 어족자원으로 매년 주꾸미축제, 전어축제가 열리고 있으며, 동서를 전망할 수 있는 위치로 해짐이와 해돋이의 광경을 볼 수 있으며 바다와 송림이 우거진 춘장대 해수욕장이 있어 여름의 정취를 즐길 수 있고 홍원항과 마량포구가 있어 다양한 어족의 맛을 볼 수가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169호인 동백나무숲과 동백정은 서면의 상징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개통 이후로 새로운 체험관광지로 부상하고 있어 관광객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서해에 마지막으로 남은 토속적인 자연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서해의 아름다운 소박한 고장입니다.

면 적 : 25.28㎢

인 구 수 : 4,718명 (4.920명/2014.1.1)

세 대 수 : 2,282가구 (2.301가구/2014.1.1)

세 대 인 구 : 2,07명 (2.14명/2014,1,1)

주민조직 : 법정리(9), 행정리(24), 반(73)

*2017년05월01일 현재(서천군 주민수기준 네번째로 큰 면)*
*(서천군에서 유일하게 남성인구가 많은 면)*


  서 면(西 面) --- 지도


  서 면(西 面) --- 전경


  서 면(西 面) --- 역사

서면은 서천군에서 유일하게 반도이다. 반도인 관계로 어업을 통한 경제활동이 증가되고 있는 면이며, 관광명소인 동백정과 춘장대 해수욕장이 날로 유명세를 얻어 가고 있는 면이다. 또한 조선시대 비인군 시절의 면 명칭인 서면(西面)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면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유일하게 공군부대가 자리하고 있으며, 전력 생산처인 서천화력발전처가 있고 부사 방조제가 제 기능보다 명소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서면의 역사는 멀리 청동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주항리와 개야리 원두리에 펼쳐진 고인돌군은 이 지역이 조그마한 소집단 을 형성했던 곳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고인돌이 있다는 것은 당시 사람이 살 수 있는 여건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좋았다고 할 수 있다. 풍부한 해산물과 주변 산에서 얻을 수 있는 노획물은 이들에게 유용 한 식량원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고인돌의 축조를 위한 협업 공동체로서 의 기능을 다할 수 있는 사회였다는 것이 당시 사회의 큰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고인돌의 이름도 순수하다. 개야리 고인돌은 학을 닮았다고 해서 학바위, 원두리 고인돌은 거북이를 닮았다고 해서 거북바위, 주항리 고인 돌은 북두칠성과 같이 일곱 개의 돌이 놓여 있다해서 칠성바위 등으로 불려오고 있다.
백제시대인이 남겨 놓은 유적으로는 주항리와 비인 칠지리 사동 마을의 경계에 고분을 남겨 놓았다. 흔히 칠지리 백제 고분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주항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총 18기의 백제 고분이 있어 주변에 백제인의 집단 거주지역으로 주항리와 원두리를 꼽고 있다. 이들은 고분외에도 또다른 유적이나 문화를 남겨 놓았겠지만 전해오거나 발견되지 않아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 좋을 것 같 다.
고려시대 유적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고려말 왜구의 침 입이 빈번하여 수난의 역사가 전개되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조선시대 역시 왜구의 침입으로 서면 도둔리와 마량리는 엄청난 수난과 약탈로 생 활고의 시달림을 받아 왔을 것이다. 특히 세종원년(1419년) 새벽에 왜선 50여 척이 공격을 해와 마량진의 김윤후가 취중에 방어격하다 그의 아들 과 장사한 사건이 세종실록에 전해 오고 있다. 효종때에는 웅천에 있던 마량진이 서면 마량리로 옮겨옴으로 명실공히 수군의 첨단 기지로 발전하 는 계기가 되었다. 전선을 파도로부터 보호하기에 적당하다는 것이 큰 이 유였지만 유감스럽게도 마량리에는 성벽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 수군의 방어 전략이 선상방어로 수군은 배에서 항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으라는 조정의 전략으로 진성이 없던 여겨진다. 그러나 마량진지를 통 하여 당시 모습을 살펴보면 성내에는 객사, 아사, 내아, 진무청, 창고, 사령청 등의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僉使밑에 군관 15인, 아 전 25인, 통인 15인, 군뇌 2인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량리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와 같이 서면사람들은 군사적 요충지에 살면서 왜구의 약 탈과 높은 파도와 싸워야하는 도전과 응전의 정신을 소유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후기에는 똥맛을 보아 부모의 병을 진단하였던 이재정 이재원 형제, 손가락을 깨물어 부모의 생명을 연장한 김용현 효자 가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주항리에 거주하는 청주 한씨들이 칠삭동이로 유명한 한명회의 사당을 과천에서 옮겨와 중건함으로 조상에 대한 숭배의식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서면의 민속으로는 바다와 근접하여 있는 관계로 풍어제가 발달하였다. ‘알지유 굿’으로 유명한 마량리 서낭제, 소머리로 제를 올리는 도둔리 남촌 풍어제, 당집을 두 개 가지고 있는 월하성 풍어제, 최근 어획량의 증가와 어항으로 발전하여 신설된 도둔 홍원리 풍어제를 들 수 있다. 풍어제는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여 마을 사람들의 협동과 단결 력을 기를 수 있으며, 생업을 통한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제관계들을 청 산하고 새로운 전기를 맞는 계기를 갖게한다. 그렇다면 서면 사람들은 공 동체의식이 강하고 소속감이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요즈음 서면의 인구 가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떠나는 서면에서 돌아오는 서면으로 변화하 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항간에서 서면의 교육을 걱정하고 있는 것은 기우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즉 바쁜 바다생활로 인하여 가정 교육이나 학교 교육에 소홀하지 말고 더욱더 관심을 갖도록 해야할 것이다.
서면 사람들은 왜구의 약탈과 파도와의 싸움으로 그 기질 이 형성되어 왔다. 그래서 서면사람들이 가진 정신은 도전과 응전을 거듭 한 개척정신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서 면(西 面) --- 지리

충청남도 서천군의 서부단에 돌출한 군내 최대의 반도인 것이 특색이다. 구릉지대인데 중앙부에 평야가 분포하고 그 속에 주항저수지(酒缸貯水池)가 있어 간척농지를 관객하고 있다. 평야의 북쪽 구릉에는 개야리(介也里), 주항리(酒缸里), 월리(月里), 부사리(扶士里)의 4개 리가 있고, 동남쪽 구릉에는 원두리(元頭里), 월호리(月湖里), 신합리(新蛤里)의 3개 리가 있으며 반도의 서쪽 끝에는 마량리(馬梁里)와 도둔리(都屯里)의 2개 리가 있다. 9개 리 중에서 신합리가 면사무소 소재지이다. 반도의 남쪽은 비인만이고 서쪽은 황해이며 북쪽은 보령군의 주산면이다. 교통은 군도가 동백정까지 연결되어 있다. 서면(西面)은 농업 및 수산업 지대이고, 마량리에는 동백나무숲과 동백정이 있으며 옛날에는 진(鎭)도 있었다. 앞으로 이 곳은 비인 공업 단지의 전원 공급지가 될 화력 발전소가 준공되었으며 지가(地價)가 오르고 있다. 비인 공업 지대는 정유, 석유화학, 화학비료, 화학섬유 펄프 및 제지 공장 등이 건설되고 항만이 확장될 예정이다.

서면은 새로운 서해안 관광지역으로 춘장대해수욕장과 동백나무숲. 해돋이마을. 배다리저수지가 있고 동백정 쭈꾸미축제와 홍원항 전어축제, 마량포구 광어축제, 해돋이마을 해돋이 축제, 춘장대 조개축제가 열리고 그리고 년중 월하성갯벌체험 등 전역에서 바다체험을 할 수 있는 천혜의 신흥 서해안 관광지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서 면(西 面) --- 유래

조선시대이전(朝鮮時代以前)에는 인적이 드물었던 해안지대였다. 비인현(庇仁懸)의 서쪽이 되므로 서면(西面)이라고 불렀으나 그 보다 조선시대 세종(世宗) 이후에는 도두음곶(都豆音串)으로 알려졌던 지역이다.  부락의 형성도 고려시대로 보며 집성부락 즉 씨족이 모여 사는 부락의 형성은 400년전으로 주축하는 지역이다.  1600년 후반기부터 수군의 진영 즉 마량진(馬梁鎭)이 태동되면서 갑자기 급속도로 정착인구가 늘어났던 지역이다.

집성부락 대성(大姓)으로는 금녕김씨(金寧金氏) 경주이씨(慶州李氏) 진주강씨(晋州姜氏)가 있으며 청주한씨(淸州韓氏) 해주최씨(海州崔氏)도 그 뒤를 이은다.  서면에는 금녕김씨 380여호 경주이씨 300여호 진주강씨 100여호 해주최씨 50여호 청주한씨가 30여호 잔재해서 집성부락을 이루고 있다.

  • [개야리](介也里) 조선시대말기에는 비인군 서면(西面)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개의 목처럼 생겼으므로 개목 또는 개야목 개묵이라 불렀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개야리(介也里)라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금녕김씨(金寧金氏)가 많이 살며 그 집성부락과 해주오씨(海州吳氏)의 집성부락도 있다.
  • [금배]  금암(金岩) 금바위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금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으므로 그리 부른다.
  • [난말]  마을이 큰마을 바깥쪽에 있으므로 난말이라고 부른다.
  • [모시래]  마을이 모래사장을 끼고 있어서 모시래 모시래라고 불러온다.
  • [도둔리](都屯里)  비인군 서면의 지역으로서 군사가 주둔하였던 곶이므로 도둠곶 도둔고지 도두음곶 도둔(都屯)이라고 불렀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도둔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 [분말]  합전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지역에서 오래된 마을집이 있어서 구말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분말이라고 부른다.
  • [모간나다리]  합전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물이 쓰면 튀어나오는 섬이 있고, 물이 들어오면 물속에 잠기는 섬이 있는 즉 모래톱이 있는 마을이라 모간나다리라고 부른다.
  • [원두리](元頭里) 비인군 서면의 지역으로서 산형의 머리쪽이 되므로 원두리(元頭里) 원두(元頭)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원두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광주안씨(廣州安氏) 연일정씨(延日鄭氏)의 집성부락도 있었다.
  • [당너머]  당제를 지내는 신당너머에 마을이 있으므로 당너머라고 부른다.
  • [매재]  옛날부터 매가 많이 날아드는 산아래 마을이 있으므로 매재라고 부른다.
  • [벌뚝]  들판 뚝근처에 마을이 있으므로 벌뚝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 [장개뜸]  장포(長浦)라고도 부른다.  긴 갯가를 끼고 마을이 있으므로 장개뜸 장포라고 부른다.
  • [재뜸]  언덕아래 즉 재(재)를 끼고 마을이 있으므로 재뜸이라고 부른다.
  • [칠성바위] 칠성암(七星岩)이라고도 부른다. 칠성바위라는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칠성바위 칠성암이라고 부른다.
  • [월리](月里)  비인군 서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달(산)의 목처럼 생겼으므로 달목 다리목 또는 월항(月項) 월항리(月項里)라 불렀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월리(月里)라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금녕김씨(金寧金氏)의 집성부락과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집성부락도 있다.
  • [선녘동내]  아래뜸이라고도 부른다.  달목아래에 마을이 있으며 서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서녘동내 선녘동내라고 부른다.
  • [안태]  마을 안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안태라고 부른다.
  • [월호리](月湖里)  비인군 서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월하(月下)와 호동(狐洞)을 이름을 딸 때 호(狐)를 호(湖)로 고쳐서 월호리라 하여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진주강씨(晋州姜氏) 40여호의 집성부락이 있다.  이곳에 정착한 진주강씨의 중시조는 강선도(姜善道)이고 14대 400여년을 거주하는 성씨다.
  • [화동](禾洞)  벼가 잘 되는 마을이라 화동이라고 부르고 옛날 숯을 구었던 마을이라 숯굴이라고도 부른다.
  • [월하성](月하城) 월하성(月下城)이라고도 부른다. 달빛아래 신선이 노는 것 같은 마을이라 해서 신성지로 꼽히던 마을이다.
  • [큰장굴]  장동(長洞)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이 길게 퍼져있다 해서 장동 큰마을이라 큰장굴이라고 부른다.
  • [호동](狐洞)호동(湖洞)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옛날에는 여우가 많이 살았던 마을이라 한다.
  • [주항리](酒缸里)  비인군 서면의 지역으로서 수렁이 많으므로 수랑골 또는 주항동(酒缸洞)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주항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금녕김씨(金寧金氏)의 집성촌이 있었던 지역으로 이 곳에 정착한 그 중시조는 김영동(金永東) 14대손이 거주하며 400여년간 거주하는 대성이다.
  • [값진모랭이]  갑진모랭이란 뜻은 마을에 있는 모롱이의 산명이다.  조선시대에 군사가 주둔할 때에 갑 을 병진을 나눌 때 갑지로 택해서 갑진(甲鎭)이라고 부르던 모롱이의 산부근에 마을이 생기므로 그리 부르게 된 마을이다.
  • [유포]  귀내 공암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앞에 포구가 있으며 바위가 있고 바다 안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귀내 공암 유포라고 부른다.
  • [새암구석]  마을이 한편 구석진 곳에 있으며 좋은 샘이 있으므로 새암구석 정동(井洞)이라고 부른다.
  • [틈개]  탄동(綻洞) 홍원이라고도 부른다.  바다를 끼고 앞이 넓게 트인 곳에 마을이 있으므로 틈개 탄동 홍원이라고 부른다.
  • [창미끝] 동북쪽에서 내려오는 푸른 산의 끝에 있다는 산이 창미끝이라고 부르는 산이고 그 산이 있는 마을이라 창미끝이라고 산명따라 부르는 마을이다.
  • [마량리](馬梁里) 비인군 서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말기 효종(孝宗) 7년(1656)에 남포현에 있던 마량진을 이곳에 옮겨 왔으므로 마량진 또는 마량이라고 부르게 된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마량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기계유씨(杞溪兪氏)의 집성촌이 있으며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집성부락도 있었다.
  • [안도둔] 내도둔(內都屯)이라고도 부른다.  도둔마을 안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그리 부른다.
  • [마량](馬梁) 조선시대에 마량진이 있던 마을이다.
  • [부사리](扶士里)  비인군 서면의 지역으로서 은자(隱者)들이 탐내는 곳이라 하여 부사먼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부사리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장수황씨(長水黃氏)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집성부락이 있었다.
  • [부사먼] 일명 부사리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세조(世祖)때부터 자주 일어나는 사화때마다 선비들이 한양을 버릴 때 탐내던 지역으로 전원에 묻히는 선비들이 이곳에 머물르면 화를 입지 않는다 하여 속칭 은자들이 탐내는 지역이라 부사먼이라고 부른다.
  • [장잣골]  옛날에 장자가 살았다 해서 장잣골이라고 부른다.
  • [신합리](新蛤里) 비인군 서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신촌(新村)과 합전(蛤田)의 이름을 따서 신합리라 하여 서천군에 편입되었다.  해주최씨(海州崔氏)와 나주나씨(羅州羅氏) 10여호의 집성부락이 있다. 경주최씨(慶州崔氏)도 많이 산다.
  • [선도래] 선돌(先乭)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선돌이 있으므로 선돌 변하여 선도래라고도 부른다.
  • [합전](蛤田) 옛날에는 마을앞까지 조수가 드나들어 조개가 많았다 해서 합전이라고 부른다.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집성부락이 있다.
  • [갓굴]  마을 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갓굴이라고 부른다.
  • [건네말]  들건너에 마을이 있으므로 건네말이라고 부른다.
  • [송림터]  옛날에 소나무숲이 우거졌던 자리에 마을이 생겼으므로 송림터라고 부른다.
  • [배다리]  주교(舟橋)라고도 부른다. 옛날에는 배가 정박했던 곳에 마을이 생겼으므로 배다리 주교라고 부른다.